격투 국회? (2005/08/02)
이번주 칼럼을 반쯤 써내려 갔을 때 쯤 일본의 한 뉴스를 접하고는 '새 파일'을 열어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 뉴스는 바로 일본 중의원과 참의원의 현직 의원 36명이 모여 '격투기 진흥 의원연맹'을 결성 했다는 소식이었다. '격투기를 사랑하는 의원들의 모임'이나 격투계의 유력 인사들이 친분을 과시하기 위한 모임 정도로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노다 요시히코 대위원장을 회장으로 타루이 요시카츠 중의원을 사무국장으로 한 이 모임은 지난달 28일 설립총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일단의 의원들이 내놓은 활동계획을 보고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졌다'. 우선 "K-1과 프라이드FC로 대표되는 격투 스포츠 이벤트를 일본의 대표적인 스포츠로 인식하고, 그 진흥을 위해 구체적인 대책을 세워가가겠다"는 설립취지는 그냥 사탕발림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일본의 강점인 격투 스포츠를 집중 육성해 일본을 격투기 메카로 자리매김시키기 위해 구상해 내놓은 대책들은 도저히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수준이었다. 우선 현직의원들은 활황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는 격투계를 지원하는 것이 훗날 자신들의 정치기반을 만들 수 있는 포석임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현재까지 이들이 내놓은 격투기 지원방안은 정리해 보면 이렇다.
- 격투기의 '예(禮)'를 중시하는 무도정신을 정규교육과정 상의 인성교육에 활용한다.
- K-1과 프라이드FC의 경제 파급효과를 모델로 4년에 한번 격투기 대제전을 개최한다.
- 격투기 박물관을 건립 하는 등등
... 구체적인 실행 방안까지 발표하고 이미 추진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무도(武道)와 무예(武禮), 격투기의 본질과 격투 스포츠의 잠재력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는 한 의원의 국정감사에서의 '한 건 올리기 위한' 엉뚱한 발언 때문에 수많은 격투팬들의 '볼 권리' 자체를 하루 아침에 박탈당하는 웃기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나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꿈 같은 이야기였다.
사실 그 의원은 격투팬들의 예상치 못한 항의가 거세지자 그 뒤에 해명을 하기도 했다. '격투기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공영방송의 책임을 지적한 것 일뿐'이라는 논리였던 것 같은데... 아뭏튼 공영방송, 정확히 말하면 채널 점유율 1% 내외를 오가는 위성방송-케이블 채널에서 하루 아침에 세계 최고의 격투 스포츠 이벤트는 TV에서 종적을 감추었었다.
그 의원이 의도 했던대로 국민의 정서함양에 책임이 있는 '공영방송'에서는 '폭력성'을 이유로 계약기간이 몇 년이나 남아있는 해당 이벤트의 중계권을 과감히 포기했다. '책임'이라... 그러면서 고스란히 날린 중계권료가 국민의 세금이라는 사실은 '책임'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일까? 여담이지만 시청자들은 안중에도 없는 공영방송의 어처구니 없는 '몸사리기' 덕분에 혈세를 날린 것은 물론, 다시 그 중계권을 사오기 위해 당초 액수의 다섯 배나 되는 돈을 지불하며 외화를 낭비한 것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사실 인류 역사상 가장 명분없는 침략전쟁에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젊은 군인들을 찍소리 못하고 내보낸 정부의 집권여당의 의원이 '폭력성' 운운 한 것은 애초부터 코미디였다. '책임'을 운운하는 곳이 국회의사당에서 배대되치기와 집단 몸싸움을 일삼는 국회가 발원지라는 사실은 역사에 길이남을 명작개그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들에게 오늘도 아파트 상가건물 2층 구석에서 땀방울을 흘리며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격투가들이 한 집안의 가장이며, 한 아이의 엄연한 아버지며, 꿈을 갖고 도전하는 젊은이라 는 것을 이해해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었다. 격투기를 하나의 관전스포츠로, 스포츠 산업으로 육성해 달라고 칭얼댄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 조차도 허락되지 않았을까? 자기는 싫어했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 자체도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을까?
이웃나라의 의원들의 행태(?)를 보면서 아무런 생각도 나지를 않았다. 그저 부러울 뿐... 우리도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외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격투기 기자생활을 하면서 만난 격투기 선수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성실했다. 사실 전혀 성실하지 않아도 부모의 노력없는 재산과 명성으로만으로도 평생을 놀고먹고 더 잘살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그 의원을 포함해 격투가들보다 더 성실한 종류의 인간들을 본 적이 없다.
격투기를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그들도 엄연한 우리 사회의 일원이며... 어두운 세계의 암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그 누구 보다도 성실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부러 강조하고 싶다. 사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절대 링위에 올라갈 수 없다. 격투기에 대한 인식을 하루 아침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 이 사실 하나만큼은 알아달라고 감히 부탁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