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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HERO'S

태극기와 일장기... 그리고 추성훈과 아키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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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5일) 한국에서 '히어로스 한국대회(HERO'S in SEOUL 2005)'가 열렸다. '한국 대 세계'라는 구도로 총 11 경기의 멋진 경기가 열렸고, 한국 대표로 나선 김종왕과 이면주, 그리고 최무배가 안타깝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김종만이 멋진 역전승을 그리고 '죠스' 김민수가 감격적인 히어로스 첫 승리를 따내 올림픽 체조경기장을 찾은 한국 격투팬들을 즐겁게 했다.

이번 대회의 컨셉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한국 대 세계'였다. 선수 발굴에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고 매치 업 등 대회 운영에 관한한 천부적인 마에다 아키라(한국명 고일명)가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여는 첫 번째 대회였기 때문에 '한국 대 세계'라는 대회 컨셉은 어쩐지 눈길이 쏠리는 대목이었다.

경기전 발표된 선수 명단을 보고 '과연 마에다 아키라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메인 이벤트 격인 마지막 제11경기에는 히어로스 한국대표나 다름 없는 김민수가 아닌 추성훈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공수가 오쿠다 마사카츠 진무관 한국지부 관장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오쿠다 관장이 일본 보다는 한국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고, 한국 격투계에서 친숙한 이름이었기 때문에 출전 선수가 발표 되었을 때 오쿠다가 한국 대표 쪽인줄 알았다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였다.


추성훈이라는 이름을 처음들은 것은 90년대 초반이었던가, 왠 재일교포 유도선수 하나가 한국으로 건너와 택극마크에 도전하겠다고 해서 신문지상이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였다. 일본과는 유도에 있어서는 적대관계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나라를 찾아 온 유도선수를 '일본에서 국가대표가 될 실력이 안되기 때문에 한국을 택한 것'이라며 폄하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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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간 잊고 있었던 추성훈이라는 이름은 몇 해 지나 다시 신문지상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국가대표 선발전 등 국내에서 잘 활동하고 있는 줄만 알았던 그가 '조국을 버리고' 일본으로 귀화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엔 폄하 수준이 아니라, 비난에 가까운 팬들의 질타가 이어지던 중, 추성훈이 한국 유도의 특정학교 출신 편들기 등 고질적인 병폐에서 비롯된 차별 때문에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된 속사정이 조금씩 알려지며 비난은 사그러들었지만 그대로 우리 뇌리에서 그의 이름 석자는 잊혀져 갔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서 우리 선수를 꺽고 일본에게 금메달을 선사했지만 우리는 애써 그를 외면했다.

또 다시 추성훈을 만났던 것이 바로 작년 이맘 때 쯤이었나? 당시 프라이드FC가 요시다를 영입하며 인기에 불을 붙이고 있을 때 K-1 쪽에서도 유도가 출신의 MMA 파이터 발굴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상황이었고 최종 낙점된 것이 바로 아키야마 요시히로, 당시 81kg급에서 세계 최고수로 평가받던... 우리가 버리고 잊었던 추성훈이었다.


추성훈이 본격적으로 격투가로 활동을 넓혀가던 때 공교롭게 한국 격투 스포츠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며 저변을 넓혀가던 시기와 같이 했다. 그러면서 여러 언론을 통해 격투가 추성훈에 대한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었던 상황... 한국 스포츠와의 불편했던 관계 때문이었을까? 추성훈을 대할 때는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감정이 남아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럴때 마다 추성훈은 '항상 한국인임을 잊지 않고 있다'며 우리를 안심 시켰다.

지난 주말 히어로스 한국대회에서 직접 추성훈을 먼발치에서 보기 전까지는 사실 그의 행보에 어떤 다른 의미를 애써 부여하지 않으려 했다. 프로 격투 스포츠의 메카인 일본 격투 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인사들에게 너무나 일방적으로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 해줬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지를 알게 되면서 부터는 굳이 화제를 꺼내지 않는게 예의라고 생각했었다. 한편으로는 늘 기사 쓸때 '추성훈(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라고 규칙에 어긋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매번 쓸때마다 마음이 불편 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번 대회에서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격투가로서의 추성훈만 보기로 마음먹고 경기장으로 나섰다. 마에다 아키라가 어떤 의미로 추성훈을 한국 격투군의 주장 격인 마지막 경기에 이름을 올려 놓았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나부터도 거론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경기장에 도착해서 선수 대기실 복도에서 우연히 추성훈과 마주쳤을 때 까지만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개막전 사전 연습 시간에도 가까이서 그의 연습 장면을 지켜보았지만 내 관심사는 온통 그의 컨디션에만 집중되었지 다른 부분을 부러 보려고 하지 않았다.


숨가쁘게 10경기가 지나가고 편안한 다소 지친 상태에서 추성훈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추성훈의 입장곡 이 경기장내에 흐르기 시작하고 이내 그가 모습을 나타내자 갑자기 나도 모르게 심장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본 습이었지만 추성훈은 첫 등장부터 눈길을 사로잡았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선수만 스포트 라이트가 집중되는데 반해 추성훈은 자신이 중앙 선두에 서고 나머지 세컨들을 3열 종대로 배치해 함께 입장했다. 자신의 양 옆의 선 세컨들의 손을 꼭 잡고 뒤에 선 세컨들은 앞의 동료의 어깨에 손을 얹어 마치 로마 부대의 단단한 대오처럼 입장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링 위에는 자신만 올라가지만 자신을 링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준 세컨들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그레이시 가문들도 '그레이시 트레인'이라고 불리는 형태로 모두 앞 사람의 어깨에 손을 얹고 일렬로 늘어서서 입장하는것으로 유명하다. 그레이시의 '그레이시 트레인'이 그레이시라는 이름의 자긍심이 표출된 것이라면 추성훈의 그것은 좀 더 장엄하고 진지한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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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전 양 어깨를 차례로 번갈아가면서 두드렸을 때 그의 양 어깨에 나란히 새겨진 일장기와 태극기가 눈에 띄었다.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루듯 추성훈은 태극기와 일장기를 차례로 두드리며 경기를 시작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경기도 물론 인상적이었다. 한국 격투군 주장에 걸맞는 걸출한 타격으로 1라운드 중반 오쿠다에게 펀치 세례를 퍼부운 끝에 TKO승을 거두었다. 가까이서 실제로 보니 유도를 베이스로 하는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타격감을 가진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후 마이크를 잡은 추성훈은 한국팬들에게 인사를 잊지 않았다. 추성훈이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추성훈은 약간은 어눌하지만 또박또박 '나는 이제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입니다'라고 마이크 어필을 시작했다. '일본 사람이 되었지만 한국 사람의 피가 여기에(가슴을 두드리며) 완전 흐르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장내는 기립박수가 터져나왔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번이나 덧붙이며 링 아래로 내려왔다.

데니스 강이 프라이드 무사도에 성공적인 데뷔를 마치고 나서 'I'm not Korean. I'm super Korean'이라고 말해 단번에 한국의 격투 팬들을 사로잡았던 것 것이 기억났다. 데니스 강의 그 말과 비슷하면서도 뭔가 다른 의미로 그의 말이 다가왔다. 도대체 뭐라고 결론을 내야할지..... 나만 심각하게 받아 들인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