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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 HERO'S

'실전격투의 꿈' 마에다 아키라 (2005/06/20)

세계 격투 스포츠의 양대산맥인 일본 격투계의 태생에는 세 명의 남자가 있었다. 세 남자는 모두 격투가 중에 격투가 들였으며 영웅이었다. 역도산, 오오야마 마스다츠 그리고 마에다 아키라...

역도산(力道山)이 프로레슬링을 통해 패전 후 굴욕과 허탈감에 빠진 일본인들에게 링 위에서라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일본 격투의 링 위에 '세계'라는 무대를 펼친 것은 이제는 우리모두 잘 아는 이야기이다. 영웅을 넘어 전설로 추앙 받았던 역도산은 그 자신이 철저히 숨기고 싶었는지도 모르지만 요코하마가 아닌 함경남도 출신의 '조센징' 김신락이었다.

오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는 세계를 '바람처럼' 돌아다니며 자신이 추구했던 '힘'과 '정의'에 대한 깨달음을 전파했다. 최배달로 알려진 최영의도 역사와 운명을 통째로 거스를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이름에 배달민족의 혼을 담아새긴 한국인 이었다. 실전 격투를 추구한 극진 가라데는 현대 격투 스포츠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타 무도와의 대결을 중시했던 극진의 신념이 K-1을 비롯한 이종 격투기의 효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간에 연이어 개봉한 영화 두 편을 비롯한 수많은 책들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위의 두 사람의 이야기는 비교적 잘 알려져있다. 격투 스포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본 격투계의 뿌리에 이 두사람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한 사람의 한국인 격투가, 마에다 아키라는 상대적으로 모르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마에다 아키라... 80년대 격동의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움직였던 레슬러였고 실전 종합격투의 효시였던 링스의 창설자였으며 현재는 신생 종합격투 이벤트 '히어로스(HERO'S)'를 이끌고 있는 인물이다. 한국명 고일명, 집안에서는 간단한 한국말로도 이야기 한다는 재일 한국인이다.

역도산이 세계라는 링을 열었고 최영의가 실전격투를 증명했다면 마에다 아키라는 실제로 격투 스포츠의 그 중심에 있었다. 고교시절 가라데를 연마했던 마에다는 당시 안토니오 이노키가 이끌던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문하여 프로레슬러로 활동한다. 탄탄한 가라데 실력에 칼 고치(Karl Gotch)라는 명 트레이너의 체계적인 유술 트레이닝 덕분에 입식과 그라운드에서 모두 격투가 가능한 실전형 프로레슬러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마에다는 MMA라는 말이 없을 때부터 이미 타격과 그래플러가 균형 잡힌 MMA 파이터였다. 투지도 흠잡을때 없었던 젊은 격투가에게 어쩌면 각본이 있는 프로레슬링 무대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노키에 대적할 만한 재원으로 꼽히는 재기 넘치는 레슬러로 기대가 컸지만 이노키 측의 일방적인 이유없는 회피와 일련의 부정사건에 이노키가 연루 되면서 무산되었다. 진작부터 신일본의 권위주의적인 수직 구조에 염증을 느끼던 마에다는 곧 신일본을 떠나게 된다.

이때 신일본을 나와 마에다가 참여한 단체가 바로 종합 격투의 모태로 알려진 UWF(Universal Wrestling Federation)다. 실전 격투를 표방한 UWF는 당시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나름대로 흥행의 잠재력을 보여줬다. 그 중심에 마에다가 있었으며 '격투왕' 타이틀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 타이틀을 물려받은 것이 그 유명한 '헤이세이의 격투왕' 다카다 노부히코 현 프라이드 FC 총괄본부장이다.

프로레슬러 마에다 아키라에 대해 잘 알려진 몇 가지 사건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초슈 리키 안면 직격사건'이다. 당시 최고 스타였던 초슈 리키와의 태그 매치에서 각본대로 진행되던 경기 중 갑자기 마에다가 초슈 리키의 안면을 온 힘을 다해 킥으로 가격한 것이다. 초슈를 실신시키며 눈 주위 뼈가 함몰되는 중상을 입힌 이 사건으로 신일본으로부터 계약해지를 당하지만 팬들은 열광했다. 당시 관중들로부터도 외면당했다면 아마 오늘날의 격투 스포츠는 없었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드레이 자이언트를 공격한 사건도 올드팬들 사이에서 아직도 회자되는 이야기거리이다. 당시 이미 '실전 프로레슬러'로서 명성을 쌓고 있던 마에다를 별로 내키지 않았던 자이언트는 시합 중에 마에다를 조롱하는 제스쳐를 보였다. 본질이 엔터테인먼트인 프로레슬링에서는 일반적인 장면이지만 불같은 성격의 마에다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가라데 킥으로 자이언트의 무릎을 실제로 공격한 것이다.

동료 선수들과의 갈등은 물론이고 언론과의 마찰도 잦았다. 심지어는 팬들과도 충돌하기까지 하는 마에다였지만 그럴 수록 팬들은 자신들도 미쳐 깨닫지 못 했던 실전 격투에 대한 열망을 더욱 드러낼 뿐이었다. 실전 능력은 최강이라는 찬사도 받았지만 '불같은 성격'이라는 오명도 함께 얻었다.

여담이지만 90년대 중반에 일본에서 역대 모든 격투가들의 데이터를 수치화하여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가상 격투를 해본 적이 있다. 여기에는 타이슨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고작 3위였다. 모두들 최배달이 최강일 것으로 예상했지만 2위에 그쳤다. 1위는?? 눈치챘겠지만 마에다 아키라였다.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1, 2차 UWF를 거치며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삐져나오기만 했던 실전격투가 마에다 아키라의 최강을 향한 꿈은 자신이 설립한 링스(RINGS)에서 이루려했다. 일본 선수들 즉, 마에다의 후배들에게도 외면받으며 출범한 링스는 일본 선수들이 참여하지 않음으로서 결과적으로 더욱 흥행할 수 있었다. 세계 각 국의 격투가들이 출전하게 되면서 흥행에는 더욱 불이 붙은 것이다.

이때부터 마에다는 선수로서 뿐만아니라 프로모터 혹은 수퍼바이저로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특히 선수 발굴 및 육성에 관해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현재 프라이드 FC의 간판인 효도르와 노게이라를 발굴한 것이 바로 마에다 아키라이다. 링스는 훗날 프라이드에게 최고의 종합 격투 이벤트의 자리는 우수한 스타 선수들과 함께 내주면서 이제는 전설로만 남았지만 100회 이상 대회를 개최하며 장수한 단체였던 것도 사실이다. 현대 입식 타격의 최고 이벤트인 K-1도 사실 판정 시비 때문에 정도회관이 링스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시작된 것이나 다름 없으니 일본 격투 스포츠에서 링스를 빼고 이야기를 하기란 쉽지 않다.

지난 3월, K-1을 등에 없고 새롭게 출범한 히어로스는 마에다 아키라의 마지막 실전격투를 향한 꿈의 산물이다. 첫 대회를 짧은 준비기간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성공적인 출발을 했다. 올 하반기에는 장장 6개월에 걸쳐 경량급 토너먼트를 실시하겠다고 공표하고 한창 선수 발굴 작업 중이다. 프라이드가 헤비급과 미들급을 주력으로 운영하고 있고 일본 선수들이 차례로 연파되며 흥행에 추진력을 잃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에다는 우선 상대적으로 일본내에서 재원도 많고 인기가 높을 수 밖에 없는 경량급에 집중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뒤에는 야마모토 '키드(Kid)' 노리후미라는 비장의 카드를 갖고 있다는 것도 큰 무기였을 것이다. 나머지는 수퍼바이저 마에다의 능력으로 채워야 하는 숙제가 남았지만 팬들의 관심은 날로 커지고 있다. 경량급으로 무대를 옮겼지만 제2의 효도르와 노게이라를 발굴할 것이라는 기대만으로도 흥행은 보장된 것으로 보인다.

마에다 아키라가 히어로스 첫 대회에 우리나라의 유도 은메달리스트 김민수를 링 위에 올리면서 우리나라 격투 팬들의 관심도 쏠리고 있다. 지난 K-1 대회 관람 차 방한 했던 마에다 아키라를 먼 발치에서만 보기만 했지만 사실 솔직한 심정으로 '한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은가?'라는 되바라진(?)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역도산을 비롯해 최영의 그리고 고일명 까지... 그들에게 한국인임을 철저히 감추고 살았다고 해서, 한국 국적을 포기했다고 해서, 일본 이름을 사용했다고 해서 비난한다는 것은 절대 옳지않다고 본다. 굳이 마에다 아키라에게 '한국인인가?'라고 묻지 않아도 그들은 굳이 말하거나 굳이 숨기려했거나에 상관없이 많은 불이익을 받으며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다카다 노부히코의 할아버지도 한국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위에 등장했던 초슈 리키도 한국인으로 한국명은 곽광웅, 1972년 뮌헨올림픽에 아마투어 레스링 한국 대표로써 참가하기도 했었다. 이래저래 한국의 피가 흐르는 격투가들이 꽤있다. 싸울아비의 후손들이라고 하면 비약일까?

비록 그 무대가 일본이였을 뿐 모두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격투계 종사자로서 기분 좋은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들의 '최강'을 향한 원대한 꿈의 실현 무대가 우리 땅이었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그들의 건승을 보며 우리만 자랑스러우면 그 뿐, 무책임한 조국애로 더 이상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폭력'이다. 진심으로 마에다 아키라의 아직도 진행중인 꿈에 대해 박수를 보내며 더욱 건승을 바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