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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 파이터

뮤지컬 프라이드 2006 (2)

1편에 이어......

격투와 서정적인 선율과의 그 아이러니
우락부락한 격투가들이라고 해서 빠르고 강렬한 음악만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파이터들이 힘찬 비트와 역동적인 기타반주가 곁들여진 강한 느낌의 음악을 주로 사용하지만, 때때로 우리는 도저히 링위에서의 혈투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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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억분의 1'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는 얼음같이 차가운 무표정한 표정과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평정심으로 가장 독특한 이미지를 창조해 냈다. '얼음주먹',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라는 그를 따라다니는 수 많은 수식어들도 이런 그만의 이미지와 그 맥락을 같이 하는데, 그의 입장곡도 이에 큰 몫을 한다. 

효도르가 테마음악으로 쓰는 'Enae Volare Mezzo'라는 곡은 비트만 없다면 중세 교회의 그레고리안 찬트같은 고상하면서도 장중한 낌을 준다. 차가우면서도 몽환적인 사운드의 이 노래는 효도르의 '얼음주먹' 이미지를 배가 시키는 것은 물론, 애써 웜업 해놓은 상대의 등줄기을 차갑게 식게 만드는 역할을 할 것만 같다.

온갖 시끄러운 음악들 속에서 차갑다못해 오싹할 정도의 고요한 선율은 그 대비효과가 극대화 된다. 세계최강의 사나이라는 그의 이력과 흔들림없는 그의 진지한 태도와 완벽하게 조화되며 역설적인 마력을 뿜어내는데 대단히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효도르의 경우는 입장 테마곡의 제목도 눈여겨 봐야 한다. Enae Volare Mezzo는 영어로하면 'Conqueror'... 즉, 정복자라는 뜻으로 한번의 전투에서의 승자가 아니라, 최후의 승자를 의미한다고 하니, '60억분의 1의 사나이' 효도르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입장곡은 따로 만들려고 해도 어려울 것 같다.

얼마전 히어로즈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한 추성훈도 아름다운 멜로디의 입장곡으로 유명하다.
맹인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브로드웨이가 낳은 불세출의 히로인 사라 브라이트만이 함께 부른 명곡인
'Time To Say Goodbye'를 쓰고 있다. 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아름다운 보컬의 조화롭게 어울리는 듀엣곡인데, 이 곡은 사실 격투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재미있는 일화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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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독일의 전설적인 복서 헨리 마스케의 은퇴식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원래는 솔로곡이었는데 헨리 마스케의 부탁을 받은 사라 브라이트만이 보첼리에게 듀엣을 제안하며 멋진 듀엣곡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 졌다고 한다. 링 과 영원히 작별하는 전설의 복서에게 관중들이 이 곡을 합창해준 장면은 세계 스포츠사에 기록될 만한 멋진 장면 이었다고 전해진다. 

추성훈은 'Time To Say Goodbye'에 맞추어 스텝들과 3열종대로 굳건하게 팔짱을 끼고 어깨에 손을 올려 대오를 짠 채 들어온다. 그레이시 패밀리의 트레인도 유명하지만, 그레이시 쪽이 가문에 대한 조금은 오만한 자부심의 발로라면, 추성훈의 대오는 자신을 링위에 존재하게 만들어 준 자신의 동료에 대한 보은의 느낌이 강하다. 언제들어도 잔잔한 전율을 주는 좋은 음악에 언제봐도 흐뭇한 입장 퍼포먼스로 늘 감동을 줄 줄 아는 파이터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입장곡의 진행에 따라 천천히 대오를 짜서 입장해서는 입장곡의 클라이막스 엔딩 부분에 시간을 꼭 맞추어 링위로 날아 들어오는 장면은 볼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하는 멋진 입장 퍼포먼스이다. 입장곡의 가사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슬픈 내용아지만, 추성훈의 경우는  어쩐지 자신과 붙게될 상대에게 이별을 고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K-1의 극진 파이터, '일격' 필리오도 비슷한 느낌의 'I ll Be Missing You'를 틀고 나오는데, 나오면서 상대에게 마치 나중에 뒤돌아보면 당신과의 경기가 그리워 질 것 같다고 고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태극전사들은 대한의 혼을 담아...
프라이드 링위에 섰던 우리의 대한격투군들은 어떨까? 공교롭게도 하나같이 한국의 혼을 담은 노래들을 들고나와 눈길을 끌었다. 프라이드 진출의 물꼬를 텄던 '부산중전차' 최무배를 시작으로, 윤동식과 데미스 강 그리고 최근의 이태현 까지... 사용하는 입장곡 모두 일관적으로 '한국'을 테마로 로한 곡들을 사용해 남다른 애국심을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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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최무배는  첫 소절만 들어도 온국민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2002년 붉은악마 공식응원가 'Into The Arena(신해철 곡)'를 사용했다. 이 음악의 도입부분에 나오는 '한국'을 부르짖으며 하나마치를 걸어나오는 장면은 최무배가 프라이드 링을 떠난 지금도 기억해 생생히 남아 있다. 2002년 세계 4강의 신화를 이루어냈던 기억과 함께 불가능할 것으로만 보였던 프라이드 헤비급 무대에서 4연승이라는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었다.
일본에서 한류 열풍이 한창일때, 최무배는 입장곡에 겨울연가의 테마곡을 믹싱하여 멋진 장면을 연출했던 적도 있다.

윤동식도 'Rock in Korea(김도균 곡)'라는 멋진 록음악에 맞춰 링위에 오른다. 이 음악은 한국의 내노라하는 로커들이 한국 록의 자존심을 걸고 내논 컴필레이션 음반의 타이틀 곡으로 세계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임재범의 보컬이 인상적인 곡이다. 한국의 록 음악을 상징하는 의미지만, 윤동식을 배경으로 흐를 때는 어쩐지 '바위'라는 원래의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윤동식을 잘 아는 사람 중 하나가 그가 '바위 같은 사람 '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데, 중의적으로 그런 이유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한다.

얼마전 때 이른 데뷔전을 치루었던 이태현도 최무배, 윤동식의 연장선상에 일맥상통한 입장 테마곡을 들고 나왔다. 이태현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Asiam' 최소리의 Arirang Party를 사용했는데, 한국 전통 씨름의 제왕이었던 그의 이력과 함께 한국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해본다.

'슈퍼코리안' 데니스 강은 원래 일렉트로니카의 대표격인 프로디지의 '불을 뿜는듯한' 강렬한 비트로 유명한 'Spitfire' 사용했었지만 현재는 한국의 음악으로 바꾸었다. 윤여규 밴드 QPIT이 데니스 강을 위해 만든 노래 'Super Korean', 이 곡을 선물받은 데니스 강 자신도 "이 곡을 가지고 출전하면 더 애국심이 생길 것 같다"고 언급한바 있다. Super Korean에 맞춰 태극기를 들고 링위에 올라서는 푸른눈의 태극전사 데니스 강이 주는 감동은 확실히 각별한 데가 있다.


파이터들의 희노애락이 담긴 입장곡들...
파이터 들 중 자신의 일부분이나 다름없는 입장곡을 바꿔들고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하나같이 사연이 숨어있어 눈길을 더욱 끌기도 한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크로캅.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없는 Duran Duran의 'The Wild Boys' 대신 다른 입장곡을 바꿔들고 나왔던 적이 있었다. 효도르와의 첫 타이틀 매치에서 도전에 실패한 뒤 마크 헌트와의 경기에서 자국 가수 Misroslav Stivicic의 비장한 분위기의 랩 음악인 'Dodji u Vinkovce'(Come to the city라는 뜻)를 바꿔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었다.

평생동안 꿈꿔왔던 챔피언 등극의 문앞에서 좌절했던 크로캅이었기에, 입장곡을 바꾸면서 분위기 반전을 시도하며 재도전을 위한 새출발을 다짐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른 살을 훌쩍 넘긴 현직 국회의원인 사내가 랩음악을 따라 부르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The Wild Boys쪽이 훨씬 크로캅에게 잘 어울린다. 유년시절을 전쟁과 함게 보낸 이력 때문일까? The Wild Boys의 불안정한 듯하면서도 애절한 사운드와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가사는 크로캅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명입장곡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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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평소에 쓰던 곡보다 바꾼 곡이 훨씬 더 잘어울리는 케이스도 있는데, 피터 아츠가 이 경우다. 원래쓰던 'Misrlou'는 사실 벌목공 복장의 피터 아츠와는 하등 관련없는 서핑 뮤직이었다. 항상 피터 아츠를 보면서 참 감각이 없는 선곡이라고 생각했었는데, 2005년 오사카 개박전에서 부터 갑자기 엘비스 프레슬리의 'My Boy'가 흘러나오는 순간, 피터 아츠도 알고 있었고 My Boy도 그전부터 즐겨 듣던 노래였는데 그 둘이 이렇게 잘 어울리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애절한 보컬로 유명한 My Boy은 불우한 복서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아들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노래속의 복서가 이혼을 앞둔 상황으로 묘사되는데 이를 두고 은퇴를 앞둔 피터 아츠의 결연함과 연결시키는 해석이 있기도 했다. 이런 저런 해석을 뒤로 하고라도 그 음악만 두고 봐도 중년에 접어든 피터 아츠에게는 My Boy 쪽이 멋지게 어울린다.


이처럼 선수들의 희노애락이 담긴 음악들을 읽어내는 것도 격투 스포츠 이벤트를 보는 또 하나의 재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두서없이 정리해보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짓는 남제(男劑)를 앞두고 있는 '뮤지컬 프라이드' '뉴지컬 K-1'에 또 내년 시즌 어떤 새로운 등장인물과 새로운 음악이 선보일지 기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