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요코하마 대회가 K-1의 모든 위기가 그대로 드러난 대회였다면, 이번 암스테르담 대회는 K-1의 희망과 가능성을 보여준 대회였다. 세계 입식격투의 상임이사국이라는 네덜란드와 동유럽의 숨겨졌던 선수자원과 선수들의 화끈한 경기를 통한 서비스 마인드가 빚어낸 근래 보기드물었던 '재미있는 K-1'을 연출해 냈다.
2008 WGP 유럽GP 타이틀은 예상을 넘어 올해 K-1에 첫선을 보인 신예 에롤 짐머만이 가져갔다. 올 2월 명문 골든글로리에서 내놓은 '신상(?)' 짐머만은 세계 최고의 입식 타격 명문팀다운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K-1 유럽무대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비욘 브레기와 자밋 사메도프를 차례로 꺽으며 유럽쪽의 세대교체의 진행상황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였다.
사실 이번 암스테르담 대회의 출전한 선수들의 면면만 본다면, 실제로 그랑프리 참가자 대부분이 K-1 1~2년차의 신진급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본야스키와 멜빈 맨호프의 수퍼파이트를 제외하면 거의 알려진 이름이 없는 국내팬들에게는 더욱 관심이 매우 적은 편이었는데, 대회 내용만 두고 본다면 근 몇년동안 가장 재미있는 화끈한 경기들이 이어졌다.
K-1 내부에서조차 K-1의 위기상황을 실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암스테르담 대회는 K-1의 위기를 타계하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다니가와 사장이 이런 실마리를 발견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K-1을 사랑하고 K-1을 눈앞에서 잃지 않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암스테르담에서의 이번 대회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힌트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번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부분은 군더더기가 쏙 빠진 빠르고 간결한 경기운영이었다. 관중들의 즐거움에 방해되는 모든 요소를 걷어낸 듯한 느낌이었는데, 중계로 지켜보기에도 산뜻한 느낌이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훨씬 단축된 선수들의 입장시간. 지하에서 올라오는 리프트 장치를 이용하여 링 사이드 바로 옆에서 곧바로 링위로 올라오는 게 가능해졌다. 선수들의 입장 시간이 대폭 단축되면서, 전체 대회시간이 크게 단축된 것은 당연한 효과. 빠른 속도로 경기가 진행되며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선수들의 입장 자체도 격투스포츠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일본에서는 선수들이 입장하는 통로를 하나미치(花道: 꽃길)라고 부르며, 입장 자체를 신성한 링위로 올라서는 동시에 관중들에 예를 갖추는 하나의 의식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실재로 현장에서 보면 화려한 특수효과와 개성넘치는 입장곡과 함께 멋진 장면을 연출되며 눈을 뗄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문제는 TV 중계시에는 이러한 현장감을 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 특히 TV 중계 시스템의 규모와 수준을 감안하면 이러한 현장감을 그대로 TV 화면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K-1이 TV 중계가 중요한 관전 스포츠인 감안하면 TV 중계시에 자칫하면 시청자들의 관심이 흐트러지거나 경기 내용과 관련없이 지루함을 줄 수있는 부분까지도 세심하게 운영하는 자세라면 절대 시청자들을 떠나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경기 운영이 아무리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해도, 경기 내용 자체가 지루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실제로 90년대 후반의 'K-1 황금시대'의 경기들이라면 몇시간을 본다고 해도 집중을 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K-1 위기론에 대한 주장들의 가장 중요한 논거가 바로 화끈한 승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인데, 바꿔 말하면 요즘의 K-1 경기는 한 마디로 '지루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번 암스테르담 대회에서는 유명 파이터들은 없었지만 경기 내용은 화끈했다. 경기결과만 봐도 이는 바로 증명된다. 전체 10경기중 KO가 7경기나 나왔는데, 토너먼트임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KO율이다. 공교롭게도 이날 모든 판정승부가 자빗 사메도프에게서 나왔는데, 이날 토너먼트 참가자 중 가장많은 K-1 출전 경험을 가졌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 치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위 K-1 물을 가장 많이 먹었다는 사메도프만이 줄기차게 클린치 플레이를 펼친 끝에 연이어 판정승부를 펼쳤다.
물론 사메도프가 원래 판정승부의 비율이 높은 스타일이고, 헤비급 치고는 상대적으로 체격조건이 열세인 정황을 감안하면 사메도프에게 모든 탓을 돌리기는 어렵지만, 이런 스타일의 선수가 그동안의 K-1 토너먼트에서 꽤 높은 승률을 기록해왔다는 것은 분명 구조적인 문제를 가늠할 수 있다.
반면에 사메도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의 신예들은 하나같이 공격적인 스타일로 관중들과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다. 관전 스포츠인 동시에 프로 스포츠인 이상 당연한 이야기지만, 유럽 파이터들은 기본적으로 클린치를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럴수밖에 없는 게 암세테르담의 관중들은 30초정도 주요한 공격이 없으면 여지없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야유를 보내왔다. 이런 관중들에게 클린치를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 혹은 클린치가 K-1 룰 상에는 엄연히 파울로 규정되어 있다보니 경험이 많지 않은 선수들은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쨋든 클린치가 줄어들었을 뿐인데, 경기 내용은 확실히 좋아졌다. 펀치와 킥의 연속기술의 회수가 늘어날 수 밖에 없었고, 카운터성 공격의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가장 중요한 경기 흐름이 끊기지 않고 심판의 쓸데없는 간섭 등 경기 지연 시간이 대폭 줄었다. 불필요한 군더더기 요소가 없어지니 실제 온 플레이 시간이 대폭 늘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KO의 빈도가 늘은 것은 물론, 짜릿한 카운터 공격과 역전승부도 많아졌다. 승리한 선수들에게는 물론이고, 더그 바이니나 카탈린 모로사누 그리고 비욘 브레기 등 '화끈하게' 패배한 선수들에게도 박수가 쏟아지는 기현상(?)도 펼쳐졌다. 우승자인 짐머맨과 비욘 브레기의 준결승에서는 KO를 4차례가 주고 받은 끝에 짐머맨이 종료 10여 초를 남기고 대역전극을 성공시켜 관중들을 열광케 했다. 공식기록으로 3라운드 2분 59초 KO...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지난 요코하마 대회 때 공식적으로 붉어진 K-1위 위기를 헤쳐나가게 해 줄 묘책과 비법은 암스테르담 대회 때 다시한번 증명되었다. 결국은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단순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K-1 관계자들과 모든 선수들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 승리하기 위한.. 혹은 관중들을 모으기 위한 접근 방식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헤쳐나갈 수 없다. 관중들과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꼼꼼한 대회 운영과, 선수 스스로 이기고 올라가기 위한 격투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경기 그 자체 외에 더 원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K-1 팬 중 그 누구도 출렁거리는 요코즈나의 뱃살과 기본적인 풋 워크도 힘든 거인 파이터를 누가 보고 싶어했겠는가? 이제 정신 차리고 다시 '본질'로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다. 정녕 K-1을 사랑한다면... 격투 스포츠 이벤트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봐야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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