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05년 7월 스포츠서울> 남아존> 반또라이의 격투로망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

지난 7일 우리나라의 김민수(30세, 링스코리아)가 출전했던 히어로스(HERO'S)의 두번째 이벤트, '세계미들급 최강자전 토너먼트'가 도쿄 요요기 국립 경기장에서 열렸다. 이미 보도된 바와 같이 김민수는 안타깝게 패배했다. 레이 세포의 마지막 하이킥도 매우 강력했지만 그전에 8-카운트까지 갔던 카운터 펀치에 워낙 강한 타격을 입어 제대로 경기를 재개하기란 이미 불가능했다.

김민수의 패배는 몇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다. 우선 MMA 데뷔전을 치루는 레이 세포를 배려한 3분 라운드 덕에 제대로 그라운드 공격을 펼칠 수 없었던 점. 통상 입식 타격으로 탐색전을 치룬 후 라운드 중후반에 본격적인 그라운드로 전개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김민수에게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시간임에 틀림없다. 이날도 김민수가 첫번째 테이크 다운을 성공시킨 후 그라운드에서 매우 유리한 포지션을 점하고 공격을 펼치려는 찰나 공이 울려 아쉬움은 더욱 컸었다.

 

▶ 김민수의 패배가 아니라, 레이 세포의 승리였다.
2라운드도 김민수에게는 두고두고 아쉬운 장면이였다. 유도가 치고는 매우 뛰어난 타격 센스를 갖추고 있는 김민수는 2라운드 초반 오른손 잽을 날리며 타격점을 찾기위해 거리를 좁혀 나갔다. 거리가 가까워지마 레이 세포가 물 흐르듯이 유려하게 오른손 공격자세로 자세를 바꿨고 김민수는 이를 미쳐 눈치채지 못했던 것. 눈으로 보기는 보았겠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줄은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져 타격점을 포착했다고 판단한 김민수가 불연듯 왼손 펀치를 날렸고 이미 오른쪽 공격 자세로 포지션 스위칭을 끝내고 기다리고 있던 레이 세포가 오른손 카운터로 맞받아 쳤다.

김민수의 펀치도 매우 위력적이었고 타이밍도 훌륭했다. 다만 그 상대가 '슈가레이 레너드의 풋워크'와 '부메랑 훅'을 가졌다는 레이 세포였을 뿐이다. 레이 세포는 단 몇 cm 차이로 김민수의 왼손 펀치를 흘려보낸데 이어 김민수의 등뒤로 돌아 들어가는 오른손 카운터를 꽂아넣었다. 김민수도 잘 쳤지만 레이 세포의 펀치가 워낙 훌륭했던 것. 세계 최고 수준의 펀치 테크니션의 의문의 여지없는 KO승이었다.

 

▶ 토코로 히데오를 만나다.
김민수의 승전보는 전하지 못해 나 또한 아쉬웠지만 오랫만에 가슴을 울리는 격투가를 만난 것은 나름대로 격투팬으로서 즐거운 일이었다. 그 주인공은 토코로 히데오(27, 일본, STAND). 마이너 종합격투단체인 ZST(현지에서는 '제스트'로 부르기도 함)출신으로 이번에 히어로스를 이끌고 있는 마에다 아키라의 지원으로 히어로스 무대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ZST는 이제는 전설로만 남은 종합 격투 단체의 원조나 다름없는 링스(RINGS)의 후신으로 알려져있다. 이제까지는 프라이드 등 종합격투 이벤트들이 주로 8~90kg 이상의 헤비급 경기만을 주로 다뤄왔기 때문에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페더급과 웰터급 등 중경량급 선수들의 역량만큼은 높은 잠재력을 인정 받았었다.

최근의 격투 스포츠의 경량화 바람이 불면서 한껏 주가상승 중. 이날 토코로와 함께 ZST 최강으로 불리는 레미기우스도 함께 참전하여 위력시범을 끝낸 바 있으며 일본인 에이스 코타니 나오유키도 프라이드 부사도 츨전이 확실시 되며 메이져 이벤트들의 연이은 러브콜을 받고 있다.

ZST는 안면 파운딩을 금지하는 독특한 룰 때문에 오히려 빠르고 역동적인 그라운드 공방이 치열한 양상으로 진화해 왔다. 타격이 중시되는 다른 단체들 보다 오히려 정교하고 멋진 그라운드 기술들이 많이 나오게 되면서 오히려 매니아들의 열성적인호응을 받기도 했다.

 

▶ '우리는 맞기 위해 버려진 개가 아니다!'
토코로 히데오는 ZST에서도 1진으로 분류되었던 선수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레미기우스나 코타니에게 늘 패배를 하던 이를테면 2인자에 가까웠다. 토코로를 주목하게 된 것은 히어로스 출전이 확정된 후 가진 인터뷰였다. 히어로스가 마에다 아키라의 야심찬 추진에도 불구하고 이번 이벤트가 '세계최강'이라는 취지에 적합하지 않은 선수들로 채워져 있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주인공으로 지목된 선수 중 하나가 바로 토코로. 메이져 대회 경험이 전무하다는 게 이유였다.

좋지 않은 이유로 주목받은 선수였지만 토코로는 당당하게 기자들에게 일갈을 던졌다. '우리는 맞기 위해 버려진 개가 아니다'라고......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는 친구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ZST의 선수들이 당한 일종의 설움을 이해하게 되자 그의 숨겨졌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 기자회견에 지각한 '청소부 파이터'
경기 전날 실시되는 관례적인 기자회견장. 토코로는 다시 한번 본의아니게 주목을 받았다. 기자회견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신인이나 다름없는 마이너 출신의, 그것도 2진급 선수가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다는 것은 일종의 사건이다. 기를 쓰고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도 시원찮을 판에... 전해 들은 바로는 토코로는 이날 지각을 했단다. 기자회견 장으로 향하던 지하철이 고장으로 멈춰 서면서 꼼짝달짝 못하고 갖혀 있었던 것. 토코로는 기자회견장에 헐떡거리며 나타나 아무말없이 지하철 역에서 발급해주는 '지각증명서'를 내밀어 대회관계자들과 기자들을 웃게 만들었다고 한다.

토코로는 프로격투가라는 직업 외에 또 하나의 직업이 있다. 다름 아닌 '빌딩청소부'. 부업 개념이 아니라 프로파이터로는 유지하기 힘든 생계를 위해 청소부로 일을 하고 있는 것. 이날 도 역시 청소 일을 끝내고 기자회견 장으로 향하다 변(?)을 당한 것이었다.

이번 히어로스 대회의 TV 중계를 담당한 TBS는 토코로의 인터뷰 영상에 청소부로 일하는 모습을 편집해 낳었다. 다른 선수들이 대회를 앞두고 분초를 쪼개며 훈련에 매진하는 것과는 당연히 대조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인터뷰 영상에서 토코로는 또 한번 눈길을 끌었다.

 

▶ '마사토는 이런 거 안 먹죠?'
청소일 중간에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을 먹으며 카메라맨에게 한마디 했다. '마사토는 이런거 안 먹죠?' 처음에는 웃음이 새어나왔지만 그의 진지한 표정에서 그 설움이 배어 나왔다. 비슷한 또래에 비슷한 체격의 똑같은 프로 격투가였지만 한 사람은 일본 격투 스포츠의 수퍼스타로 록본기 거리를 벤츠를 타고 누빌 때, 한 사람은 빌딩 구석에서 청소기를 돌리며 도시락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격투를 본업으로 하며 부업으로 CF와 방송 출연을 하는 마사토와는 달리 토코로는 격투를 하기위해 아르바이트로 청소를 했던 것이다.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갑자기 서글펐던 것은 사실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프로 격투가들은 직접 체육관을 운영하거나 지도자로 제대로 급여를 받고 종사하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토코로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수들뿐이 아니다. 소위 '격투계'에 업을 두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대부분 경제적으로 곤란을 격고 있다. 언론에서는 '격투기 열풍'이니 '본격 격투 스포츠의 시대'라는 등 온갖 수식어로 상황을 과장 하고 있지만 그건 일본의 격투 이벤트에 해당하는 이야기 일뿐, 우리나라 현실은 아직도 '헝그리'하기는 전과 크게 다를바 없다. 일본에는 마사토라도 있지 우리나라는 현실에서는 마사토가 나올 수 없다. 이런 현실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이어서 다룰 예정이다. 이번에는 이 정도로 줄이겠다.

 

▶ 근성의 한계를 넘어서...
다시 토코로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경기를 앞두고 이래저래 시선을 끌었던 토코로였기에 개인적으로는 경기가 매우 기다려졌다. 미들급 토너먼트 첫 경기인 제 6경기에 나선 토코로는 브라질 출신의 알렉산드레 프란카 노게이라(26세, 슈토 브라질)을 맞아 메이져 대회 데뷔전을 치뤘다. '작지만 강하다'는 의미로 '페케뇨(포르투칼어로 '작다'는 뜻)'라는 별명을 가진 알렉산드레는 주짓수와 루타리브레의 고수로 -65kg 급에서는 세계최강 중 하나로 첫 손에 꼽히던 강자다.

일본 슈토 무대에서 주로 뛰던 페케뇨는 슈토의 제왕으로 사토 루미나 조차도 넘지못했던 강자였기 때문에 이번대회 우승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었다. 그라운드에서 워낙 강하고 정교한 기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타격에 별 장기가 없는 토코로가 내세울 카드가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토코로에게는 객관적인 전력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다. 단순히 근성으로 치부하기에는 왠지 그 한계를 벗어난 듯한... 그 무엇인가...

1라운드 중반쯤 예상대로 그라운드에서 민첩한 모습을 보이던 페케뇨가 먼저 기회를 포착했다. 토코로가 머리가 먼저 들어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완벽한 길로틴 초크를 잡은 것. 페케뇨의 킬로틴 초크는 견고하기로 정평이 나있었고 이날도 한치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걸린 기술이었기 때문에 토코로가 탭아웃을 할 줄 알았다. 토코로의 근성을 넘어선 '그 무엇'은 이 순간 그 실체를 드러냈다. 초크기술이 경동맥에 압박을 가해 뇌로 올라가는 혈류를 차단하여 순간적인 가사상태에 빠지게 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실체로 단 십수초 정도만 초크를 걸어도 실신에 이를 수 있으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필살기 중에 필살기이다. 선수들은 이런 초크 기술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초크에 완벽하게 걸리면 그대로 경기를 포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토코로의 경우는 달랐다. 완벽하게 걸린 초크였지만 그대로 버텨냈다. 페케뇨가 더욱 강하게 조이며 체중을 실어내자 넥 크랭크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한 압박을 가해오는 데도 토코로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목을 빼낸 것. 탈출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반격을 해와 오히려 기술을 건 페케뇨 쪽이 당황할 정도 였다. 이어진 페케뇨의 끊임없는 그라운드 공세에도 토코로는 효과적으로 방어를 해냈다. 오히려 2라운드에서는 간간히 무릎공격을 성공 시키며 포인트를 만회하며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갔다.

사건이 터진건 연장 공이 울리자 마자 토코로가 말그대로 벼락같은 백 스핀 블로우를 페케뇨의 안면에 적중시킨 것. 펀치 자체의 위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지만 타이밍이 완벽했고 토코로의 몸이 공중에 뜰 정도로 체중이 모두 실렸으며 정확하게 페케뇨의 안면에 적중했다. 페케뇨가 미쳐 대비하지 못했던 때에 절묘하게 허를 찌른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였다. 일순간 자신들을 버려진 개로 취급하지 말라며 울분을 토해내던 이 청소부 파이터에게 요요기에 모인 격투팬들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 히어로스 미들급 토너먼트 '최대 이변'
사실 이번 경기를 앞두고 토코로도 잘 몰랐지만 페케뇨의 경기도 본 적이 없었었다. 그저 주짓수 기반이 탄탄하고 루타 리브레의 마스터로 맨 몸의 종합격투에 적합한 서브미션을 구사할 줄 아는 선수라는 정도 밖에 정보가 없었었다. 그래서 사실 경기 당일에는 토코로의 승리가 이변인지도 몰랐다. 그저 경량급에 무게가 실려진 슈토와 ZST간의 자존심 대결에서 ZST가 이번에는 우위를 보인 것 정도로 생각했던 것도 사실.

미국의 사이트들은 이번대회 결과를 전하면서 하나같이 페케뇨가 무명의 일본 파이터의 기습에 당했다는 내용을 앞다투어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것을 보고서야 사태를 짐작했을 정도였다.

토코로의 근성을 넘어선 투혼의 승리의 드라마는 그렇게 이변을 만들어내며 드라마처럼 막을 내렸다. 토코로는 끝까지 시선을 놓칠 수 없게 만들었다. 승리가 선언되자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며 뛰어다니더니 그대로 링 밖으로 몸을 날리다시피 뛰쳐나가 버린것이다. 당황한 카메라가 급하게 화면을 바꿔 비춘 것은 자신을 불러준 마에다 아키라 앞에서 큰 절을 하는 토코로의 모습이었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불러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면서 토코로는 잠시나마 마사토를 경험했을지 모를 일이다.

비록 히어로스 '한국대표' 김민수의 승리는 또 다시 다음으로 미뤘지만 토코로를 만난 것으로 한결 위안이 되었다. 토너먼트 2회전 상대로 스도 겐키를 지목한 토코로, 타격이 취약하기 때문에 챔피언이 되기는 어렵다는 좋지 않은 전망속에서 다시한번 우리를 놀라게할 투혼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물론 김민수의 첫 승 소식이 있으면 더 좋고...

2005/07/12 21:56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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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격투칼럼니스트 이정민/ 격투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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